번역일을 오래 하다 보니 영어식 표현이 얼마나 깊이 자리 잡았는지 절실하게 느낍니다.
영어 사대주의의 영향도 있고, 열악한 번역 업계의 현실, 직업의식과 관심의 부재 등등 이유야 많겠지만, 알면 알수록 입안이 씁쓸해지는 부분입니다.
질보다는 속도가 중요해지면서 출판사나 신문사의 콘텐츠에도 전문가 교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오역과 오타 위주로 검수하고 넘기는 번역은 문제가 많을 수밖에요. 똑같이 번역일을 해도 수입이나 작업 환경은 천차만별인 현실을 알기에 무작정 비난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일이 좋고 제대로 된 커리어를 쌓고 싶다면 꼭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내 몸값, 단가를 높이는 건 언어 실력만이 아니거든요. 고객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꼼꼼히 따지고 대안과 조언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차별화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어의 따옴표와 앰퍼샌드(&)는 큰따옴표를 작은따옴표로 대체하는 정도의 수고도 없이 그대로 옮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워낙 빈번하고 다들 익숙해져서 그 자체로 컴플레인이 들어오지는 않아요. 최대한 적은 시간에 많은 분량을 처리하는 게 우선순위라면 굳이 번거롭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죠.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런 부호를 낫표와 온점, 대괄호 등으로 대체하면 가독성이 훨씬 좋아지고 전문적으로 번역되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번역하는 사람의 생산물은 언어고, 여느 상품처럼 ‘디자인’이 중요합니다. 통역이라면 어조나 말투가 그렇고, 텍스트는 띄어쓰기, 줄 바꿈, 문장 재구성, 부호 사용으로 내 번역의 상품 가치를 높일 수 있습니다.
‘및’과 ‘또는’은 영한 번역에서 오남용되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영어에서는 여러 항목을 나열할 때 마지막 항목 앞에 꼭 and나 or을 써서 구분하지만, 한국어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앞뒤에 오는 두 항목의 관계가 같이 나열된 다른 항목과 다르다는 늬앙스를 줄 수 있어요. 그리고 영어와는 반대로 처음 두 항목을 ‘과/와’나 ‘(이)나’로 연결하고 쉼표로 이어 나가는 게 더 자연스럽죠. 제목이나 목록에서 앰퍼샌드를 그냥 남기거나 ‘및’으로 번역하는 대신 빗금(/)이나 온점(·)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걸 번역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래 두 문장을 비교하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1) 넉넉한 크기의 수건, 구급 및 개인 상비약, 갈아입을 옷, 따뜻한 음료를 챙겨가면 좋습니다.
(2) 넉넉한 크기의 수건, 구급 및 개인 상비약, 갈아입을 옷 및 따뜻한 음료를 가져가는 것을 권장합니다.
1번과 2번의 의미 차이는 거의 없지만 1번이 훨씬 깔끔하게 잘 읽힙니다. 2번은 번역한 느낌이 나죠. 영문이 없어도 어디에 and가 있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한국어로 작성했다면 쓰지 않았을 두 번째 ‘및’을 저렇게 그대로 옮기는 영한 번역이 90% 정도 됩니다.
아, 예외적으로 법률 영한 번역은 원문을 최대한 따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계약서 조항 같은 건 분쟁이 생길 때 표현 하나하나의 해석이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 원래는 번역 후에 전문가가 따로 교정을 봐야 합니다. 처음부터 관련 전공자에게 맡기거나요. 중요하지만 의외로 잘 지켜지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 마케팅 번역이라며 약관 번역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부분을 확실히 하고 거절하거나 의뢰를 수락한다면 법률 단가를 요구해야 합니다.
괄호 사용도 기본 사용 규범을 알고 있는 게 좋습니다. 문장을 구성하는 성분은 기본적으로 번역 대상에 포함되니까요. 낫표와 화살괄표는 일반 번역에서는 안 보이는데 다들 적극적으로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원어민으로서 우리말 부호를 쓰는 데 눈치 볼 이유가 없으니까요.
번역에서는 영어와 한국어를 함께 표기하는 일이 많아서 소괄호가 굉장히 많이 쓰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이 잘 모르는 규정이 있어요.
대한민국(大韓民國), 크레용(crayon)
자유 무역 협정[FTA], 국제 연합[United Nations]
차이를 아시겠나요? 국립국어원 어문 규범에 나온 예시를 가져온 건데, “고유어나 한자어에 대응하는 외래어나 외국어 표기임을 나타낼 때” 대괄호를 쓴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아래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국제 연합 교육 과학 문화 기구[UNESCO] / 유네스코(UNESCO)
국제 연합[United Nations] / 유엔(United Nations)
참고로 기구나 단체명, 전문 용어는 띄어쓰기를 줄이고 붙여 쓰는 것이 조건부로 허용됩니다.
부호의 번역은 현지화[localization]의 영역입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작업하거나 기존 번역을 다 고치기 어려운 경우, 그 외 다양한 이유로 다 적용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모르고 그냥 넘어가는 것과 알고 넘어가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물론 번역사도 사람이고 저도 실수를 합니다. 검수하시는 분이 납품 전에 그런 걸 잘 잡아주면 고맙고 든든하죠. 검수자가 꼭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번역하는 사람은 내가 작업한 내용이 잘못된 우리말 사용을 부추기지 않도록 조심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상투적으로 사용되는 문장이나 표현, 부호가 나도 모르게 학습된 번역체는 아닌지 항상 고민해야 하는 시대니까요.
한국인들도 익숙하지 않았던 ‘톺아보다’라는 표현은 애플 번역을 담당한 누군가 덕분에 다시 알려지고 더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번역사로서 굉장히 뿌듯했습니다. 좋은 표현을 찾기 위해 고심했을 심정이 상상되고 나도 이런 식으로 언어 사용에 기여하는 번역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데드폴 2 자막을 보며 ‘저게 창작 번역이지’ 하며 감탄했던 것처럼요.
더 많은 사람이 번역일에 자부심을 갖고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잠재력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글에 언급된 내용은 국립국어원 해당 페이지에 잘 정리되어 있으니 직접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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